같은 병원에서, 같은 근무 환경에서, 같은 수면 부족을 견디던 수많은 인턴 중에서 왜 하필 나만 환자가 되었는지, 그때의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바라왔던 의사가 된 순간이었는데, 마치 운명처럼 환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억울하고 속상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질병이 찾아오는 방식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와는 무관하며,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요.
질병은 확률 게임이다 필연과 우연의 만남 질병은 '확률 게임'입니다. 필연과 우연이 겹치는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나쁜 생활 습관은 우리를 질병의 확률을 높이는 '필연'쪽으로 밀어냅니다. 금연자보다 흡연자의 폐암 발병률이 높은 것처럼요.
하지만 모든 결과가 필연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담배 근처에도 가지 않던 사람이 폐암을 진단 받기도 하고, 젊은 나이에 암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연의 확률이 크게 작용하여 운명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운명적 질병은 교통사고와도 같습니다. 상대방의 잘못만으로도 피할 수 없는 사고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누군가는 특정 질병에 유난히 취약할 수 있습니다. 고혈압일수도, 당뇨병일수도, 저처럼 궤양성 대장염일수도 있습니다. '가족력' 역시 그 질병에 더 취약한 조건을 타고났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쁜 습관과 환경은 타고난 취약성에 '필연의 확률'을 높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확률 게임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같은 운명적 질병 앞에서도 사람들의 태도는 서로 다릅니다. 크게 세가지로 나뉩니다.
1️⃣ 운명을 부정하는 사람
2️⃣ 운명에 체념하는 사람 3️⃣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저는, 무려 10년 동안 첫 번째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1️⃣운명을 부정하는 사람들 운명이란 없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저 역시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환자'라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처방받은 약은 먹지 않았고, 불규칙한 생활을 반복했으며, 불건강한 식습관을 고수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힘겨루기에서 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 대가로 저는 다섯 번의 재발을 경험했습니다. 운명을 부정할수록 운명은 저를 더 아프고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진료실에서 저는 과거의 저와 닮은 환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질병이라는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과감하게 진료실을 떠납니다. 약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혈압과 혈당을 조절하려 합니다. 그들 역시 최선을 다하지만, 운명은 종종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조절되지 않는 혈압, 혈당으로 망가지는 콩팥, 끝내 투석이라는 운명 앞에 서게 됩니다.
2️⃣운명에 체념하는 사람들
"우리 집은 다 당뇨예요”
아버지, 어머니에 이어 가장 마지막으로 당뇨를 진단받은 아들의 말이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놀라움도, 분노도 없었습니다. 당뇨병을 가족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이미 체념한 듯했습니다.
운명에 체념하는 사람들은 나쁜 결과에도 변화의 의지를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삶의 방향은 바꾸지 않습니다. 기존의 습관을 그대로 고집합니다. 약은 점점 늘어나고, 합병증은 조용히 진행됩니다.
이 체념은 개인의 태도를 넘어, 가족의 분위기가 되기도 합니다.
당뇨병을 비롯한 고혈압 같은 만성 질환은 유전병은 아닙니다. 다만, 가족력이 강한 질환입니다. 가족은 한 공간에서 살아오며 밥상 뿐 아니라 생활 리듬을 공유합니다. 함께 살아온 시간을 닮기 때문에 질병도 그렇게 대물림됩니다. 하지만 같은 조건을 물려받았다고 해서 모두 같은 질병을 진단받는 건 아닙니다.
3️⃣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당뇨병이나 고혈압을 진단받은 뒤, 오히려 자기 관리 끝팥왕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혈압과 혈당을 기록하고, 식단 관리는 물론 하루 걸음수 까지 꼼꼼히 확인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감탄합니다.
그들은 운명을 긍정하고,
그 운명 안에서 삶의 방향을 다시 선택합니다.
운명을 부정하던 저는 10년이 지나서야,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섯 번의 재발을 겪은 뒤였고, 무엇보다 엄마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삶이 더 이상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궤양성 대장염이라는 운명을 끌어안고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원하지 않았던 환자가 되었던 것도 모두 '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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